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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요시다 암굴왕 사건은 다이쇼 시대에

일어난 강도살인사건이다. 이 사건은 사건 자체보다

피해자로 구속되었던 요시다 이시마츠 때문에

유명해진 사건이기도 하다.

일본명:吉田岩窟王事件


다이쇼 2년, 1913년 8월 13일.

나고야 시 지쿠사 구 길거리에서

비단 소매상이었던 한 남성이 살해되고,

1엔 20전을 빼앗기는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다음 날 바로 잡혔는데

2명의 남성이었다. (당시 22세, 26세)



그러나 그들의 한 마디에 멀쩡한

사람이 주범으로 제포된다.

그가 바로 요시다 이시마츠.


요시다 이시마츠는 실제로 이 두사람과

관련이 없었지만 진범 2명은 자신들의

죄를 가볍게 할려고 요시다 이시마츠에게

모든 죄를 덮어 씌울려고 하였다.


당연히 요시다는 부인을 하였지만

수사당국은 진범들의 말만 믿었고,

심지어 요시다에게 고문까지 가하였다.



1심에서 종범으로 처리된 

진범 2사람에게 무기징역을 선고, 

요시다에게는 사형이 선고된다.


요시다는 이에 항소심과 상고심을 하였고,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확정되었고,

결국 요시다는 억울하게 복역을 하게 된다.


그는 다이소 7년. 1918년에 재심청구를

하였지만 기각되었고, 형무소도 두 번이나

옮겨야했다. 그 이유는 그가 결백을 호소하여

옥중에서 날뛰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시다씨가 마지막으로 간 형무소는

아키타 형무소였는데 그 곳의 형무소장이

요시다에게 가출소 후 재심청구를 권한다.


쇼와10년. 1935년 3월 요시다는 가출소를 하고,

자신에게 누명읠 씌운 2명을 찾아간다.

(그들은 5년 전인 1930년에 이미 가출소중이었다)



그리고 1936년 그들에게서 허위자백을 인정.

이것을 근거로 요시다 이시마츠는 세 번째

재심청구를 한다. 하지만 또 다시 기각당한다.


그러던 중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다.

그는 피난처인 도치기현에서도

무죄를 호소하였고, 



쇼와 27년. 1952년 신문사와 변호사에 호소,

쇼와 33년. 1958년 네 번째 재심청구를 하지만

또 다시 기각당한다. 요시다씨는 법무성에 까지

찾아가 호소하지만 대신과의 면담은 거부당한다.


다만 당시 법무성 직원이 요시다 이시마츠의

일관된 주장에 신용할 수 있다 판단.

일본 변호사 연합회에 인권옹호부로 안내한다.


일변연이 움직이기 시작하여  여론의 관심까지 

집중되자 국회에서도 움직임이 보였고,

쇼와 35년. 1960년 다섯 번째 재심청구에서

나고야의 고등재판소 제4부 재판장이던

고바야시 토이치가 인정한다.


하지만 검찰측이 이의신청 5부 재판장이던

카게야마 마사오가 검찰측의 이의신청을

인정하여 재심청구는 다시 취소된다.



그러나 2년 뒤인 쇼와 37년. 1962년 10월

최고 재판소에서 검찰의 이의신청이 

부적합하다고 판단, 고등재판소 제5부의 결정을 파기.

결국 나고야 고등재판소 제 4부에서 재심이 확정된다.


재심에서 요시다 이시마츠는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게 되었고, 이례적으로 재판부의 사과가 이루어졌다.

또한 부당하게 구속된 그에게 315만 5600엔을 형사보상을 해준다. 

요시다씨는 무죄를 인정받자 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무죄를 인정받은지 9개월 후에

고령에 의한 체력저하로 사망하게 된다.


도치기 현에 있는 그의 무덤에는

'인권의 신 여기에 잠들다'라는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