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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5월 24일 일본에서 4세의 여아가 행방불명

다음 날 5월 13일 근처 강가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경찰은 사건 발생 7개월이 지난 12월

프로파일링에 의해 범인상을 추측,

과학수사로 수사방향을 전향하였는데

당시 과학수사란 충분한 연구도 없었기에

문제점이 상당히 많은 수사방법이었다.



경찰은 독신남과 생활패턴이 단조로운 사람 및

규칙을 준수하는 사람 중에 로리콘이 많다는

황당한 주장으로 수사를 하였고,

이에 스가야 도시카즈(菅家利和,45세)라는 남성이 체포된다.


그는 유치원 운전기사였는데 자신의 근무지로

경찰이 수사를 위해 탐문하였는데

이 일로 억울하고 해고를 당하였고


심지어 1991년 12월 2일 별 다른 확증도 없는데

외설을 목적으로 한 유괴 살인 혐의로 구속,

1992년 부터 복역한다. 그는 3심까지 항소하나

경찰이 내민 증거가 법원에서 인정되면서

2000년 무기징역 판결을 받는다.



경찰이 내민 증거는 피해자 의류품에서 나온

체액에서 나온 스가야의 DNA


하지만 사실 이 체액은 스가야의 버린 쓰레기에서

나온 휴지의 체액을 기준으로 하였고,

당시 DNA검사도 시작단계였기에 전혀 다른 사람의

DNA로 검사해도 일치하는 확률이 있는 엉터리 검사였다.



하지만 다행히 1999년 비슷한 사건에서 DNA감정 실수로

이 감정이 부정확 할 수 있다라는 선례가 만들어졌고,

2008년 스가야는 DNA 재감식을 요청한다.



최초 지팡재판소에서는 이를 기각하였으나

도쿄 고등재판소는 인정하며 17년만에 DNA재감식을 하였고

감식결과 '일치하는 부분이 적기에 동일 인물이라 보긴 힘들다'

라는 판정이 났기에 17년만에 스가야 도시카즈는

임시출소 형태로 출소한다.


그리고 최후 공판인 2010년 3월 26일

스가야 도시카즈는 무죄판결을 받았고

우즈노미야 지방검찰청장이 스가야 도시카즈에게

검찰측의 대표로 사과를 하였고

그에게 보상금 8,000만엔 및 재판 비용 1,200만엔을 보상한다.


그가 무죄로 판결이 났지만, 그의 집은 이미 파탄나 있었다.

아들의 체포에 아버지는 심부전으로 사망,

무죄를 믿던 어머니는 석방 2년전 노환으로 별세,

스가야 도시카즈의 부모님은 아들의 무죄를

살아서는 들을 수가 없었다.


현재 스가야 도시카즈씨는 이런 힘든 일을 겪었으나

사회운동가로 활동중이라고 한다.



여담이지만 이 사건을 담당했던 모리시타 아키오

형사부장은 끝까지 진범이 스가야라는 글을 블로그에 올려

일평생 들은 욕의 배는 더 먹었다고 하며,


피해자의 유가족은 경찰에게 화를 내며 진범을 잡으라고 분노,

하지만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잡아도 처벌 할 수 없기에

안타까움만 남게 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사건명:足利事件 (あしかがじけん)